A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 · 10한사2-01-01 · 3문항
문제 110한사2-01-01객관식
다음 법령의 제13조가 규정한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제1조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정상에 따라 태형에 처할 수 있다. ⋯
제13조 본 영(令)은 조선인에 한해 적용한다.
— 조선태형령(조선총독부 제령 제13호), 1912년 3월
②가 맞습니다. 태형은 갑오개혁(1894) 때 이미 폐지된 잔혹한 신체형이었는데, 일제는 이를 되살리면서 제13조에 본 영은 조선인에 한해 적용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같은 죄를 지어도 일본인은 벌금을, 한국인은 매를 맞은 것입니다. ①의 즉결심판권, ③의 신문지법·보안법, ④의 회사령(1910)은 모두 1910년대 무단통치에 실제로 있었던 억압 정책이지만, 제시된 조선태형령 제13조가 규정한 내용은 아닙니다. 사료에서 직접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조선인에 한해'라는 차별의 문구입니다.
문제 210한사2-01-01객관식
다음 자료를 근거로 1920년대 이른바 문화통치를 평가한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경찰 수: 1919년 6,387명 → 1920년 2만여 명 (경찰서 736개 → 2,761개)
· 조선일보·동아일보 발행 허용(1920) — 그러나 검열·정간·폐간이 이어짐
· 고등경찰 설치, 치안유지법 제정(1925)
④가 맞습니다. 보통경찰제로 바꾸었다지만 경찰 수는 1919년 6,387명에서 1920년 2만여 명으로 3배 이상 증가했고, 고등경찰과 치안유지법(1925)으로 사상 통제가 강화되었습니다. 신문 발행은 허용되었으나 검열·정간·폐간이 일상이었습니다. 헌병경찰제가 부활한 것은 아니므로 ①은 틀리고, 자치권 확대나 실질적 완화로 보기 어려우므로 ②·③도 맞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를 통치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전술의 변화로 봅니다.
문제 310한사2-01-01OX 판단
다음 설명은 옳을까요?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한국인과 일본인의 평등을 주장하였고, 실제로 한국인에게 참정권을 주고 조선 총독 자리도 한국인에게 열어 주었다.
틀립니다. '내선일체'는 표면적으로 평등을 표방했지만, 본문은 진짜 평등이라면 한국인에게 참정권을 주거나, 조선 총독을 한국인이 맡을 수 있어야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구호만 평등이었을 뿐 실제는 동원과 차별이었고, 그 목적은 한국인의 민족 정체성을 지우고 천황의 신민으로 동화시켜 전쟁에 동원하는 데 있었습니다.
B
경제 구조의 변화와 경제생활 · 10한사2-01-02 · 3문항
문제 410한사2-01-02객관식
다음 통계에서 쌀 생산은 조금 늘었는데 일본으로의 수출만 4배로 늘어난 까닭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쌀 생산량: 1920년 1,488만 석 → 1932년 1,587만 석 (약 7% 증가)
· 일본으로의 쌀 수출량: 1920년 175만 석 → 1932년 758만 석 (약 4배 증가)
· 만주에서 들여오는 잡곡 수입량: 급증
—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요약)
③이 맞습니다. 본문은 수리조합비·종자·비료 대금을 모두 농민이 부담해 빚이 늘었고, 빚을 갚지 못한 농민이 쌀을 강제 매각하면서 시중 쌀이 일본 미곡상으로 흘러갔다고 설명합니다. 증산에 드는 비용을 농민이 떠안았기 때문에, 늘어난 쌀보다 훨씬 많은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간 것입니다. 만주 잡곡 수입은 쌀이 빠져나간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므로 ①은 앞뒤가 바뀌었고, 쌀을 내다 판 것은 농민의 선택이 아니었으며 일본 내 미곡 과잉은 오히려 1934년 계획이 중단된 이유였으므로 ②도 맞지 않습니다. 미곡 공출제는 1942년의 전시 정책이라 이 통계의 시기와 어긋납니다(④).
문제 510한사2-01-02객관식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시행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농민이 땅을 잃은 까닭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이 맞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은 신고주의·기한부 신고를 원칙으로 삼았는데, 신고 기간이 짧고 서류가 한문·일본어로 되어 있어 신고하지 못한 땅과 국·공유지·문중 토지·마을 공동 소유 토지가 대량으로 총독부에 귀속되었습니다. 총독부는 소유권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명목상의 소유자만 인정했으므로 ②는 틀리고, 소작농은 오히려 1914년 19.4%에서 1932년 53.8%로 늘었으므로 ③도 맞지 않습니다. 회사령 폐지는 1920년의 일이라 시기도 어긋납니다(④).
문제 610한사2-01-02분류
다음 식민지 경제 정책을 무엇을 빼앗으려 한 정책인지에 따라 알맞은 칸에 넣어 보세요.
항목을 누른 뒤 넣을 칸을 누르면 들어가요. 칸에 든 것을 누르고 위 ‘보기’ 칸을 누르면 다시 꺼낼 수 있어요.
토지와 자본을 빼앗다
쌀을 빼앗다
전쟁에 쓸 물자와 사람을 모으다
토지조사사업(1910~1918)은 신고주의의 함정으로 토지를 빼앗았고, 회사령(1910)은 회사 설립을 허가제로 묶어 한국인 자본의 성장을 눌렀습니다. 산미증식계획(1920~1934)은 한국의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정책이었고, 증산에 드는 수리조합 조합비까지 농민이 떠안아 빚을 지고 땅을 잃었습니다. 남면북양은 군복·담요에 쓸 면화와 양모를 얻으려는 정책이었고, 국가총동원법(1938)은 사람과 물자를 전쟁에 동원할 법적 근거였습니다. 토지 → 쌀 → 자원 → 사람으로 수탈의 대상이 옮겨 간 흐름입니다.
C
국내외 민족 운동의 전개와 분화 · 10한사2-01-03 · 3문항
문제 710한사2-01-03객관식
1932년 윤봉길 의거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져온 결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③이 맞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등을 처단하자,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공식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는 뒷날 한국광복군 창설(1940)의 외교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김구가 한인애국단(1931)을 조직한 것 자체가 국민대표회의 결렬(1923) 이후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의 위기를 뚫으려는 시도였습니다. 의거 뒤 임정은 오히려 일제의 추격이 거세져 상하이를 떠났으므로 ①은 틀리고, 「조선혁명선언」은 1923년 의열단을 위해 쓰인 글이라 시기가 맞지 않으며(②), 임정은 항저우·전저우·창사·광저우 등을 거쳐 1940년에야 충칭에 정착했으므로 ④도 사실과 다릅니다.
문제 810한사2-01-03객관식
3·1 운동(1919)이 한국 민족 운동에 가져온 변화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②가 맞습니다. 3·1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직접적 계기였습니다. 흩어진 운동을 하나로 모을 필요가 절실해져 상하이 임시정부·한성 정부·대한국민의회가 1919년 9월 11일 통합 임시정부로 합쳐졌습니다. 3·1 운동으로 일제의 통치는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뀌었으므로 ①은 틀리고, 임시정부는 왕정 복고가 아니라 민주공화제를 임시헌장 제1조에 못 박았으므로 ③도 아닙니다. 중국 5·4 운동과 인도 비폭력 운동은 3·1 운동이 자극을 준 쪽이므로 ④는 앞뒤가 뒤바뀐 설명입니다.
문제 910한사2-01-03객관식
신간회(1927)가 결성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이 맞습니다. 1920년대 민족주의 진영이 자치론과 비타협적 민족주의로 갈라진 가운데, 1926년 정우회 선언을 계기로 사회주의 진영과 비타협 민족주의의 연대가 무르익어 1927년 2월 신간회가 결성되었습니다(회장 이상재). 1923년 국민대표회의는 창조파·개조파·유지파로 갈려 결렬되었으므로 ②는 사실과 다르고, 조선공산당은 치안유지법(1925)과 네 차례의 검거 사건(1925~28)으로 오히려 와해되었으므로 ③도 맞지 않습니다. 물산장려·민립대학설립 운동은 오히려 실력양성론·자치론과 결합되기도 했고 자치론을 없애지도 못했으므로 ④도 틀립니다.
D
사회·문화의 변화와 대중운동 · 10한사2-01-04 · 2문항
문제 1010한사2-01-04객관식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 규모로 번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④가 맞습니다. 이 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광주~나주 통학 열차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11월 3일 광주 시내의 한·일 학생 충돌로 번졌습니다. 일제 경찰이 한국인 학생만 검거하자 동맹 휴학이 이어졌고, 신간회의 진상 조사와 후원으로 시위가 전국에 퍼져 320여 학교·5만 4천여 명이 참여한 3·1 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 시위가 되었습니다. ①의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 ②의 근우회 강령, ③의 형평사 발기 취지문(1923)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활동이지만, 이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주체는 아니었습니다.
문제 1110한사2-01-04OX 판단
다음 설명은 옳을까요?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과 『우리말큰사전』 편찬은 학술 활동에 그치지 않는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이었다. 일제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회원들을 검거하고 사전 원고를 빼앗았으며, 그 과정에서 이윤재·한징이 옥에서 목숨을 잃었다.
옳습니다. 본문은 한글 정리·역사 연구·문학 창작을 두고 단순한 학술 활동이 아니라 정신의 독립 운동이라고 평가합니다. 조선어학회는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1933)·표준어 사정(1936)·외래어 표기법 통일(1941)·『우리말큰사전』 편찬을 추진했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3명이 검거되어 이윤재·한징이 옥사했습니다. 압수된 사전 원고는 광복 후 서울역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1957년에야 『큰사전』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일제가 어문 연구 단체까지 탄압한 사실 자체가 이 활동의 성격을 보여 줍니다.
E
독립 국가 건설 운동 · 10한사2-01-05 · 2문항
문제 1210한사2-01-05객관식
다음 선언에 쓰인 적당한 시기에라는 표현의 뜻과 그 영향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앞서 말한 세 강대국은 한국 국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이 자유롭게 독립국이 될 것임을 결의한다.
— 카이로 선언(1943.11.27.)
②가 맞습니다. 카이로 선언은 한국 독립을 국제 사회가 공식 약속한 최초의 문서였지만,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라는 표현은 즉각 독립이 아니라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친다는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김구는 왜 우리에게 적당한 시기인가? 우리는 35년이나 준비해 왔다며 분노했고,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5년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반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즉각 독립을 뜻하지 않으므로 ①은 틀리고, 독립 자체는 약속되었으므로 ③도 아니며, 소련의 대일전 참전 합의는 얄타 회담(1945.2)의 내용이므로 ④도 맞지 않습니다.
문제 1310한사2-01-05객관식
다음 두 강령을 견주어 볼 때, 두 단체의 구상이 실제로 갈라지는 지점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1941) — 보통 선거를 실시하고, 토지와 대생산 기관은 국유화하며, 의무 교육을 실시한다.
· 조선독립동맹 강령(1942) —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공화국을 세우고,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해 무상으로 분배하며, 8시간 노동제와 의무 교육을 실시한다.
③이 맞습니다. 두 강령은 보통 선거·민주공화국·의무 교육에서 사실상 같은 지향을 보이므로 ①·②·④는 차이가 되지 못합니다. 갈라지는 곳은 토지입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따라 토지와 대생산 기관은 국유화한다고 했고, 조선독립동맹은 토지의 무상 몰수·무상 분배를 내걸어 토지 정책에서 더 급진적이었습니다. 광복 직전 독립 운동은 충칭의 임시정부(한국광복군), 옌안의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국내의 조선건국동맹(여운형) 세 갈래로 나뉘어 저마다 새 나라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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